사람은 백 년을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이들과 스쳐 지나갑니다.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연인가 봐요.” 그렇다면 인연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연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인연의 이치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까요? 지금부터 진푸티 종사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통해, 신비로운 ‘인연’의 의미를 함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인연은 어디에서 오는가

1. 수많은 인연의 실타래가 모여 인연이 된다

먼저 ‘인연’이라는 것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스승님, 인연이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은 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수많은 정보와 관계들이 얽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처음 봤는데도 이상하게 눈에 익고 마음이 편안할 때가 있습니다. 괜히 친근하고,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바로 그런 것이 인연입니다.

2. 인연을 이성적으로 대하고, 억지로 붙잡지 마라

인연이라는 것은 정말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저 역시도 가끔 어떤 사람을 보며 “아, 인연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연을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이 사람이 나와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 하고 더 깊이 생각해보려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보는 순간 괜히 마음이 어수선해진다면, 조금 미신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전생의 원수이거나 연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전생에 돈 문제로 얽혔던 사람일 수도 있고, 서로 다투고 갈등하던 사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서로에게 마음의 빚을 졌던 인연일 수도 있겠지요. 특히 어떤 사람을 보고 설레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참 묘하고 아름다운 느낌이지요. 하지만 이런 인연을 만났을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미 연인이 있거나 결혼한 사람이라면,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 정도로 끝내야 합니다. 눈을 감고 5분만 지나면 그 감정도 지나갑니다. 그래야 잘못된 행동을 피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연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꼭 내 곁에 붙잡아 둘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그것 또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연’을 내세워 친해지려 하거나 보험을 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이고, 전생에 당신은 제 동생이었나 봐요.” “전생에는 우리 가족이었나 봐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평소에는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정하게 대해주고, 예쁘다고 말해주고, 안아주기까지 하면 괜히 마음이 가까워집니다.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잘 이해해주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요. 그런데 며칠 뒤 갑자기 보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면 괜히 거절하기도 미안해집니다. 마치 전생의 가족에게 미안한 사람이 된 것 같지요. 그래서 인연에 관한 일에서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인연을 끌어다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3. 전생의 인연

두 번째로는, 모든 인연을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인연을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험을 팔기 위해서, 혹은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억지로 인연을 끌어다 붙이는 경우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꼭 상대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저 왠지 낯설지 않고 예전부터 알던 사람 같은 느낌이 들며 호감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정말 전생의 인연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자신의 가족과 닮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자매를 닮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이지요.

많은 여성들이 배우자를 찾을 때 자신도 모르게 오빠나 아버지를 닮은 사람을 찾습니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가족과 비슷한 느낌인 경우가 많습니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까지 비슷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는 소끼리, 양은 양끼리 어울리듯 사람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우자를 찾을 때 자신과 닮은 부분이 있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특별히 마음이 움직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함께 작용합니다.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전생에 끝나지 않은 인연이 남아 있거나, 아직 풀리지 않은 일이 이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둘. 윤회와 전생에 관한 이야기

1. 하이난의 환생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 활불의 환생 이야기는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으십니까? 또 여러분 자신도 윤회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믿으시나요?

과학자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직접 실험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증명된 것만 받아들이고 인정하지요. 게다가 자기 혼자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많은 사람들의 확인과 검증도 필요합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환생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어떤 환생한 사람들은 전생의 일을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 하이난섬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마흔이 넘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세 살이 되었을 무렵,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계속 말했습니다. “내 집은 단저우에 있어요.” 그가 말한 곳은 당시 살던 곳에서 160km 넘게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도 아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꼭 데려다줘야 해요. 내 여자친구도 보고 싶고, 우리 아버지도 보고 싶어요.” 부모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에게 무슨 여자친구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아이의 말을 흘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전생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생에 스무 살 무렵 사람들과 싸우다가, 이웃 마을 청년에게 칼과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청년은 그렇게 죽은 뒤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환생했고, 지금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는 전생의 일을 거의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섯 살이 넘어서도 그는 매일 부모에게 전생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모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계속 이 이야기만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생겨 결국 아이를 데리고 가보기로 했습니다. 당시에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바로 가는 교통편도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화물차를 타며 하루 종일 이동한 끝에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아이가 말하던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두 마을은 쓰는 사투리가 달라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단저우 방언을 아주 유창하게 했던 것입니다.

아이가 그 마을에 도착하자 아버지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집 앞에 멈춰 서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마당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가 다가가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전생의 아버지는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넌 누구냐?” 그러자 아이는 자신의 전생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전생의 가족들이 한 사람씩 다가올 때마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또 전생에 사귀던 여자친구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 여성은 이미 서른 살쯤 되어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여자친구의 이름까지 말하며, “당신은 제 여자친구였어요.” 라고 했습니다. 여성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니? 어린애가 함부로 그런 말 하면 안 돼.” 하지만 아이는 두 사람이 예전에 함께 지냈던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말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여섯 살짜리 아이였는데, 누가 미리 가르쳐줬다 해도 그렇게까지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현지 사투리까지 자연스럽게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환생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중국 후난성의 한 산골 마을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소수민족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환생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백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환생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전생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젊은 나이나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 뒤에도 전생의 일을 비교적 분명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모두 윤회하여 태어났을 수 있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다는 것입니다.

셋. 윤회로 이어지는 인연 — 소원

1. 소원을 품고 다시 오다

어떤 사람들은 전생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와 부부의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이 세상에 다시 오기도 합니다. 전생의 정이 깊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 돌아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 전에는 두 사람 모두 젊고 건강하며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는데, 결혼한 지 2년쯤 지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남편을 돌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불교에서는 이것 또한 인연과 빚을 갚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함부로 소원을 빌거나 맹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맹세나 소원을 세웠는데 이번 생에서 다 이루지 못하면, 다음 생에도 이어서 갚아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회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면도 있습니다. 특히 화가 났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어떻게 되면…” “내가 이렇게 죽어버리겠다…” 이런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퉤퉤퉤” 하고 털어버리십시오. 그런 맹세는 취소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소원과 맹세의 힘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진푸티 종사와 조사님의 인연

환생과 인연에 관한 일은, 사실 저 자신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 스승님께서 처음 저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첫 만남이었는데도 스승님께서는 저를 보시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왔구나? 나는 네가 두 달쯤 뒤에야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스승님께서 제 뒤에 있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너 말고 누구겠느냐? 바로 너지.”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예전부터 저를 아셨습니까?”

그러자 스승님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허허, 어린아이라 말해도 아직 이해 못 한다. 단지 아는 정도겠느냐?”

그 뒤로 스승님께서는 저에게 여러 이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스승님은 아버지처럼 느껴지면서도 위엄이 있으셨습니다. 두렵기도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굳이 스승님께 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어떤 상태인지 모두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제가 수련을 열심히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도 스승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보통 선생님들은 학생 앞에서 “뭐 하고 있었니?” “또 딴짓했지?” 하고 묻지만, 스승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아도 제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스승님 사이에는 굳이 “제가 얼마나 스승님을 존경합니다.” “얼마나 좋아합니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지낸 사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3. 강도를 만난 인연

가끔은 어떤 일을 겪다가, 정말 뜻밖의 순간에 누군가 나타나 도와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밤늦게 티베트 포탈라궁 아래를 걷고 있었습니다. 가로등이 모두 꺼져 있었는데,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돌을 던져 전등을 깨뜨렸는지, 아니면 정전이 되었는지 사방이 캄캄했습니다. 저는 그 길을 혼자 걷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크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강도가 나타나 칼을 제 허리에 들이대며 말했습니다. “돈 꺼내!”

저는 말했습니다. “저 돈 없어요. 너무 가난해서 저도 돈 털고 싶은 사람인데, 뭘 또 저를 털려고 합니까?”

강도가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돈 내놔!”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형님, 진짜 돈이 없습니다. 저도 진짜 돈이 필요해요. 우리 둘이 힘을 합쳐 다른 사람 털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같은 업계 사람끼리 왜 이럽니까? 저도 강도예요!”

강도는 말했습니다. “돈 없다고? 닥치고 꺼내!”

그러더니 칼을 들이댄 채 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더 차갑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움직이지 마. 한 번만 움직이면 쏴버린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정말 재수 없구나. 강도를 둘이나 만났네.’ 뒤를 돌아보니, 또 다른 강도가 총을 들고 먼저 온 강도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이 사람은 도와주러 왔구나!’ 그래서 얼른 말했습니다. “친구, 정말 잘 왔어요. 타이밍이 딱이네요!”

그러자 뒤늦게 나타난 강도가 말했습니다. “말하지 마.”

그 사람은 먼저 온 강도의 칼을 빼앗아 제 손에 쥐여주고, 그 강도가 가지고 있던 돈 20위안도 몽땅 털어갔습니다. 그리고 총을 든 강도가 먼저 온 강도를 끌고 가며 말했습니다. “가자, 술이나 마시러.”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 누군가가 나타나 도와주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어렸지만,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니 남과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신 뒤 그 두 강도가 오히려 저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두 사람 다 저보다 두 살이나 많았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형님, 티베트는 너무 위험합니다. 강도도 많고요. 앞으로 저희가 형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 두 사람을 데리고 스승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을 바로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리 와서 차를 따라라.”

저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스승님, 이 강도들을 스승님께서 보내신 겁니까?”

스승님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왜 강도를 보내 너를 털게 하겠느냐?”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사람 이름을 아십니까?”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보니 그 이름일 것 같더구나.”

제가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처음 보자마자 일을 시키십니까?”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아하니 일하게 생겼더구나. 저 둘은 평생 경호원 같은 일이나 하게 될 사람들이다.”

나중에 스승님께서는 이 두 사람이 사실은 호법의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보호해주는 인연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결국 스승님께서 보내신 거 아닙니까?”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저 하늘에 네 보호를 맡겼을 뿐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는 나도 모른다. 네가 그런 일을 당할 줄도 미리 알지 못했다. 다만 누군가 너를 지켜주면 되는 것이다.”

나중에 저는 처음 만났던 강도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거길 지나갈 줄 알았습니까?”

그 강도는 말했습니다. “누가 지나가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그냥 배고프고 가난해서 아무나 턴 거야. 배가 너무 고파서 돌아다니다가 마침 너를 만난 거지.”

이런 우연과 인연은 생각할수록 참 묘합니다. 인생에서 겪는 여러 만남과 사건들은 때때로 저로 하여금,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꼭 불교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믿든 상관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생각이니까요. 다만 아직 더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는 돈 말고도 행복이 있습니다. 산을 바라보며 느끼는 행복도 있고, 누군가의 노래를 들으며 느끼는 행복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도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물론 돈이 없으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돈만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생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전생에 불교를 배웠든 도를 닦았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경지를 추구하느냐입니다. 추구하는 경지가 높을수록 사람도 더 좋아집니다. 저 역시 이런 환생 이야기들과 티베트에서 접했던 윤회와 전생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윤회와 환생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깊이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갑자기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모두 전생부터 이어져 온 생명의 본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부모, 스승, 가족과 인연을 맺고, 또 여러 배움과 인연을 이어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전생의 인연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온 것일 수도 있고, 전생에 세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수행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한 사람이 “나는 수행하겠다, 스승을 따라 배우겠다.”는 마음을 깊이 세우면, 다음 생에도 계속 그 스승을 따라 다시 태어난다고 봅니다. 그렇게 여러 생을 거듭하며 수행을 이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4. 환생한 수행자들

저는 티베트의 환생한 활불들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활불이 환생해 돌아오면, 라마승들은 그 아이 앞에 여러 물건들을 늘어놓고 정말 환생한 활불인지 시험합니다. 예를 들어 염주를 수십 개 놓아두면, 환생한 아이는 전생에 자신이 쓰던 염주를 바로 알아보고 집어 들어 목에 겁니다. 그 아이를 시험하러 온 라마들은 모두 불교계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운도 강해서 보통 사람들은 보면 자연스럽게 경외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네댓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오히려 라마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합니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제 발 좀 주물러 주세요.”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전생에 그 라마가 바로 자신의 제자였고, 실제로 발을 주무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아이였다면, 그렇게 위엄 있는 옷을 입고 수염까지 기른 낯선 사람들을 보면 겁을 먹거나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환생한 활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환생한 활불이 자신이 전생에 머물던 절에 돌아갔을 때의 일도 있습니다. 절에서 키우던 개가 평소에는 누구를 봐도 짖어댔는데, 그 아이가 가서 “앉아.”라고 하자, 개가 얌전히 앉았다고 합니다. 개조차도 그 사람이 원래 이 절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본 듯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환생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넷. 인연과 업력

1. 업력과 공덕이 운명을 결정한다.

생명이 윤회하며 이어진다면, 우리는 이번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여러분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대부분은 여기 아프고 저기 아파서 왔을 것입니다. 또 과학을 특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사도 방법이 없다고 해서 왔습니다. 병이 급하니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여기 오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인연입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병 때문에 수행의 길로 들어서기도 합니다. 예전에 저는 깊은 산속에서 좌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저는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사형, 왜 이렇게까지 고행을 하십니까? 하루에 열몇 시간씩 방 밖에도 안 나오고 수행하시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자 한 수행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 제대로 수행 안 하면 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거요.” 처음에는 정말 존경했는데, 알고 보니 죽음이 두려워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 우리 선원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업력’입니다. 업력이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사람의 삶 속에 쌓인 좋고 나쁜 인연의 총합입니다.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업’이라고 하면 나쁜 것만 떠올리지만, 사실 업에는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어서 좋은 일을 해도 쌓이고, 나쁜 일을 해도 쌓입니다. 이 업력은 USB에 정보를 저장하듯 저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든 정보와 에너지는 하늘과 땅 사이, 이 자연의 세계 속에 저장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특히 결혼을 하거나 오십 세 전후가 되면, 이번 생의 업이 어느 정도 굳어집니다. 다시 말해 인생의 방향과 운명이 점차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에는 몇 가지 중요한 기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결혼입니다. 어떤 사람과 결혼하느냐에 따라 후반기의 운명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왜 어떤 사람은 결혼 후 인생이 점점 힘들어질까요? 어쩌면 상대의 업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왜 어떤 사람은 결혼 후 모든 일이 잘 풀릴까요? 그것 역시 좋은 인연과 공덕의 영향일 수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배우자를 만나게 될까요? 불교에서는 그것을 악업의 인연이라고 말합니다. 또 왜 어떤 사람은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인생이 좋아질까요? 그것은 선행과 공덕이 가져온 결과라고 봅니다. 결혼 후 승진하고, 재물이 늘고, 사업이 잘되고, 자손까지 번창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 역시 모두 공덕과 인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스승을 기만하면 인과응보가 따른다.

제 나이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거의 평생을 두고 정말 공덕이라는 것이 있는지, 업력이라는 것이 있는지, 또 환생이라는 것이 있는지를 연구해왔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런 이야기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신화나 전설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없습니다. 직접 찾아보십시오. 정말 환생이라는 개념이 있는지, 또 선행과 악행이 정말 인과응보를 가져오는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부처님 앞이든, 보살님 앞이든, 혹은 자신이 믿는 신 앞에서 “이제부터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남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속이지 않겠습니다. 욕하지 않겠습니다. 훔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맹세를 했다면, 그 맹세를 어겼을 때 반드시 그에 따른 벌이 따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수행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그때 어린 사제 한 명이 있었는데, 저는 그를 ‘소사제’라고 불렀습니다. 그 소사제는 원래 스승님의 시자를 맡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늘 스승님 곁에서 심부름을 하고, 때로는 제 잡일도 도와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정작 수행할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티베트의 장족이였는데, 티베트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불교를 믿었지만, 종교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은 아니었고,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는 저에게는 속마음을 잘 털어놓았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형,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나 윤회 같은 게 진짜 있을까요?”

제가 말했습니다. “아마 있을 거다.”

그러자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안 믿어요. 한번 스승님을 속여보고 싶어요. 스승님이 정말 아시는지 한번 보려고요.”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속이려고?”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기회를 봐야죠.”

어느 날 그 아이가 스승님께 식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날 남은 밥이 있었는데, 사실 새 밥도 막 지어놓은 상태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감히 남은 밥을 스승님께 드리지 못했겠지요. 그런데 그날은 일부러 남은 밥을 그릇에 담아 잘 섞은 뒤 스승님께 가져갔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스승님, 식사하십시오. 오늘은 스승님 좋아하시는 밥으로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그러자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새 밥으로 가져오는 게 더 좋겠구나.”

그 아이는 한 순간 당황했지만 끝까지 우기며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게 새 밥입니다.”

그러자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혼나고 싶으냐?”

그날은 처음으로 소사제가 크게 놀란 날이었습니다. 나중에 저에게 와서 몰래 말했습니다. “와… 저 노인네 정말 대단하네.” 그 뒤로 또 한 번은 소사제가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스승님께 들킨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 아이를 꾸짖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또 담배 피우면 네 귀를 잡아 뜯어버릴 줄 알아라. 알겠느냐?”

그 아이는 얼른 말했습니다. “네, 안 피울게요.”

그런데 어느 날 스승님께서 외출하신 틈에 그 아이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라싸 어디에서 영화 상영한대요. 우리 보러 갑시다!”

저도 영화가 보고 싶어서 함께 갔습니다. 영화관은 아니었고, 야외에 장비만 세워놓고 영화를 틀어주는 곳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사제가 말했습니다. “사형, 한 대 피울래요?”

제가 말했습니다. “난 안 피운다.”

그 아이는 말했습니다. “그럼 나 혼자라도 한 대 피워야지.”

제가 물었습니다. “스승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벌써 잊었냐?”

그 아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에이, 지금 스승님도 안 계신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요? 한 대만 피울 테니까 말하지 마세요.”

저는 괜히 스승님께 말하는 것이 의리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래, 알아서 해라.”

그 아이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땅콩 하나를 먹고, 또 한 모금 피우고 또 땅콩을 먹었습니다. 저는 보면서 점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너 스승님 앞에서 약속했잖아. 맞지?”

겉으로는 아무 말 안 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생각했습니다. ‘호법신이 있다면 저 녀석 좀 혼내줘라. 그래야 정신 차리지.’ 한참을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는 여전히 담배 한 모금, 땅콩 한 알 하며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입안의 담배꽁초를 뱉어냈습니다. 땅콩을 집어먹는다는 게 그만 담배를 입에 넣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혀에 물집까지 잡혔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습니다. “어때? 스승님 영험하시지?”

그 일을 겪고 난 뒤부터 저는 사람이 좀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신령한 존재가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는 그 존재를 볼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3.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진짜 자비다.

만약 여러분이 신이나 부처님 앞에서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한 적이 있다면,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특히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일수록 더욱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 덜 탐내고, 조금 더 양보하고, 조금 더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복과 재물이 돌아오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비를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도리를 알게 되면, 진짜 경영이 무엇인지, 장사가 무엇인지, 교육이 무엇인지, 또 사장은 어떻게 해야 하고 직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가정 안에서든 사회에서든,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결국 이치는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간사한 상인은 큰 부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설령 큰돈을 벌었다 해도, 돈은 얻고 목숨이나 복은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탐욕에 빠질 때는 스스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이 욕심을 감당할 만큼의 복이 있는가?’ 눈앞에 이익이 놓이고, 재물과 미색이 사람을 흔들 때, 과연 그 욕심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 말이 너무 무겁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 진심입니다.

우리는 탐욕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야 하고, 선행과 좋은 일 앞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좋은 일은 무엇이든 앞장서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거지를 만났을 때도, 진짜 거지인지 아닌지를 너무 따지기보다, 도와줄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베푸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신이나 부처님의 화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불교식으로 말하면, 어쩌면 관세음보살의 화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을 보면 가까이 가고 싶어 하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사람을 보면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더 많이 베풀고 공양해야 합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책도 많이 읽고 평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우리가 왜 그들을 도와야 합니까? 그 사람은 고생할 만해서 고생하는 것 아닙니까? 스승님께서도 업력을 말씀하셨잖아요. 그것이 그 사람의 업력이라면, 우리가 왜 도와야 합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70세 된 할머니가 구걸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분이 당신의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한 노인이 다리를 절며, 눈이 1미터 넘게 쌓인 추운 날씨에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구걸하고 있다면,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모님은 잘 살고 계십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오늘은 잘 살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내일은요? 장담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여기고 외면한다면, 어쩌면 내일은 그들이 이곳에 무릎 꿇고 구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풍수는 돌고 도는 법입니다. 오늘은 부유해도 내일은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구걸하는 노인이 당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라면, 구걸하는 아이가 당신의 아들이라면, 그래도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가정이 실제로 맞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바로 “역지사지”입니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법을 배우고도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면, 혹은 오히려 나쁜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제대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말하는 것은 결국 자비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가르침도,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대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부처님과 여호와의 모습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결국 그 크나큰 사랑과 자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대가 돈이 많을수록 더 잘 보이려 하고, 더 도와주려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사실은 필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은 ‘금상첨화’에 가깝습니다. 금상첨화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재물이나 욕심 때문인 경우도 있고, 아첨하거나 다른 목적을 가진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설중송탄’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여러분이 선한 일을 한 적이 있다면, 어쩌면 그 선행 덕분에 이번 생에 저와 함께 공부할 인연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일단 저와 공부할 인연이 생긴 사람은, 저는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업을 덜어주고, 과거의 잘못된 업력을 조금씩 풀어내도록 돕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여러분이 선과 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먼저 마음속에 선한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가난하고 힘들고 약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해서, 업을 없애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산을 전부 내놓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과 가족의 삶도 돌봐야 하니까요. 다만 자기 형편 안에서 조금씩 베풀면 됩니다. 1원이든, 10원이든, 1,000원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자비심을 기르는 일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고, 작은 꽃이나 나무 묘목을 키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길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자비로운 행동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